산과바다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ㄷ-2)
11. 도정누란(倒整累卵)
달걀을 거꾸로 쌓다. 四溟堂과 西山大師가 서로 道力을 겨룰 때 달걀을 거꾸로 차곡차곡 쌓은 데서 由來했다. 不可能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낼 때 이르는 말이다.
* 宣祖實錄 韓國人의 人間 上에.
朝鮮 第14代 宣祖 때 義兵將 四溟堂 (惟政 1544~1610)이 오랫동안 金剛山 等地에서 道를 닦은 끝에 縮地法을 익히자 혼자 생각했다.
‘妙香山에 道術 높은 西山大師 (休靜 1520~1604) 라는 큰 스님이 계시다는데 그와 道力을 한 번 겨뤄 봐야겠다. 萬若 나의 道力이 모자라면 그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道를 더 닦아야지.’
四溟堂은 이제 막 익힌 縮地法을 利用하여 몇 걸음 만에 妙香山 入口에 닿았다.
西山大師는 四溟堂이 올 줄을 미리 알고 妙香山 골짜기의 물을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흐르게 해 놓았다. 그 光景을 본 四溟堂은 큰 感動을 받았다.
“亦是 道術이 뛰어난 스님이시군.!”
四溟堂은 새 한 마리를 잡아 가지고 西山大師 앞에 가서 물었다.
“大師님, 제가 이 새를 어떻게 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西山大師가 大門 門地枋에 다리를 앞뒤로 걸치고 서서 되물었다.
“大師, 그럼 내가 只今 밖으로 나갈 것인지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맞혀 보시오. 그러면 나도 맞히리다.”
“그거야 나오시든지 들어가시든지 大師님의 마음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大師님은 저를 맞으러 나오시는 길이니까 아마 나오시리라 생각합니다.”
西山大師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大師 亦是 손안의 새를 죽이든 살리든 大師 마음이 아니겠소? 그러나 大師가 산목숨을 죽이지는 않을 것으로 아오.”
“맞습니다. 스님께서 수수께끼 하나를 못 맞히게 하기 爲해서 貴한 生命을 죽일 수는 없지요. 허허허.”
四溟堂은 시원스럽게 웃고 나서 손안의 새를 날려 보냈다.
두 大師는 마루 房에 마주 앉았다. 四溟堂은 冷水 한 그릇을 請한 다음 그 물에 가지고 온 바늘 百 쌈을 쏟았다. 그러자 바늘이 곧 먹음직스런 국수로 變했다.
“大師, 그 국수 맛이 참 좋을 것 같구려, 내가 먹어도 되겠소?”
西山大師는 瞬息間에 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마셔버리더니 곧바로 바늘 百 쌈을 뱉어냈다.
그러자 四溟堂은 準備해 온 달걀 百 個를 차례차례 괴어 올리기 始作했다.
“大師의 道力이 참으로 놀랍구려.”
西山大師도 달걀 百 個를 가져오도록 하더니 처음 한 個를 虛空에 머물게 한 다음 그 아래쪽으로 連 이어 받쳐 내려가면서 거꾸로 쌓는 것이었다.
分明히 西山大師의 才주가 더 뛰어났다. 그때 四溟堂이 오른손을 들자 하늘에 구름이 모여들어 今새 소나기가 쏟아졌다.
“大師의 道力도 참으로 놀랍군요. 허허허…….”
말을 마친 西山大師는 내리는 빗줄기를 거꾸로 하늘로 솟아오르게 했다. 땅에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지지 않게 만든 것이다. 四溟堂이 한 首 아래임을 自認하고 선
“大師님, 제가 졌습니다. 이제부터 大師님의 弟子가 되어 熱心히 배우겠습니다.”
四溟堂은 큰절을 하고는 西山大師의 弟子가 되었다.
西山大師 밑에서 道를 닦은 四溟堂은 壬辰倭亂 때에 倭將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와 세 번이나 만나 談判을 지었으며, 1604年에는 國書를 가지고 孑孑單身 日本에 건너가 倭王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을 만나 强和를 맺고, 포로(捕虜) 3,500名을 데리고 돌아왔다.
12. 도보왕종(徒步往從)
맨발로 걸어가서 따라 배우다.
* 里鄕見聞錄에.
朝鮮 明宗 代의 儒學者였던 文敬公(諡號) 一齋(號) 李恒(姓名)이 어려서 놀고 豪氣를 피우기를 좋아해서 씨름과 활쏘기, 말타기에 當代 最高 水準이었다.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 오자, 叔父가 깨우치고 꾸짖으니 두려워하여 글을 읽고 마음을 바로잡아 道를 求하여 明快하게 얻은 바가 있었다. 松堂 朴英이 武科로 높은 境地에 올랐음을 알고, 맨발로 걸어 찾아가서 배워 硏磨하여 크게 깨우쳐, 마침내 큰 선비가 되었다.
13. 도지기진(都知其眞)
누구나 알고 있는 그것이 眞理이다. 卽 眞理는 平凡한 가운데에 있다는 뜻으로, 洗手를 할 때 코를 만지는 것만큼 쉽고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이다.
* 禪雲寺 住持僧傳承에.
주지(住持)스님에게 한 佛子가 찾아와 물었다.
“眞理란 都大體 뭡니까?”
“자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그게 무슨 소린가?”
“眞理가 무엇인지 알아듣기 쉽게 說明해 주십시오.”
스님은 눈을 감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으음! 眞理는 말로나 글로 表現할 수 없을 만큼 사유(思惟)된 認識과 外界의 存在, 或은 現實이 一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네. 그래서 不立文字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는 글로는 到底히 說明할 수 없다는 말이지. 그러나 자네가 그토록 간절(懇切)히 請하니 내가 아는 대로 說明하겠네.
딸만 셋을 둔 홀어머니가 있었다네. 母女는 늘 함께 生活을 하다 보니 서로 事情이 通하게 되어 말하지 않아도 以心傳心으로 心情이 通하게 되었지.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지 툭 터놓고 서슴없이 나누는 아주 돈독(敦篤)한 母女 사이였던 게야.
그러던 어느 해에 딸의 나이가 차 시집을 가게 되자 어머니가 딸을 앉혀놓고 다짐을 했어.
‘媤집을 가거든 무슨 일이든지 기탄(忌憚)없이 이 에미에게 말해야 한다.’
‘예, 아무렴요. 어머니께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그 後 딸이 婚姻을 하여 사위와 함께 新行을 왔는데 어머니가 딸을 골방에 불러 놓고 물었다네.
‘얘야, 첫날밤을 치르는데 男便이 어떻게 했는지 말해 주렴.’
그러자 딸이 約束한대로 對答했다네.
‘맨 처음 머리에 쓴 족두리와 비녀를 빼고…….‘
‘그다음은?’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다음은?’
‘치마끈을 풀고…….‘
‘그 다음은?’
‘男便과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요.’
‘다음은?’
‘그리고 男便이…… 에이 어머니도…….’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는 거야, 어머니도 더 以上은 물을 수 없는 處地라 마찬가지고……. 그 어머니는 새 딸을 두었는데 똑같이 이 대목에서 말을 맺곤 했다네. 眞理란 바로 이와 같은 거라네. 말할 必要가 없고,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都知), 그런 거 말일세(其眞)”
14. 도판여인(圖版女儿)
地圖를 그리는 여인(女儿)이라는 말로, 朝鮮 말 大東輿地圖를 그린 金正浩의 딸을 이르는 말이다. 孝誠이 至極한 딸, 또는 어떤 일에 決定的인 도움을 준 딸을 뜻한다.
* 朝鮮名人傳, 韓國의 人間像에
朝船 末의 地理學者 古山子 金正浩 (?~1864)는 大東輿地圖를 만들기 爲해 30如 年間 朝鮮 八道를 세 番, 白頭山을 여덟 番이나 오르내렸다. 그리하여 1861年, 마침내 大東輿地圖2集을 完成했다. 또 與地勝覽의 잘못된 곳을 訂正하기 爲하여 32券 15冊의 大東地志를 執筆했으며, 地球圖도 製作했다.
金正浩의 이런 業績 뒤에는 地圖를 그리고 板刻을 하면서 그와 함께 苦生을 한 딸의 孝誠이 있었기에 可能했다.
金正浩가 最初로 地圖를 보게 된 것은 같은 書堂에 다니던 親舊 김용희로부터 邑圖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야, 이거 정말 新奇하구나, 이것만 있으면 이 마을 全體를 앉아서 꿰뚫어 볼 수 있잖아.”
地圖에는 山과 내, 그리고 마을의 位置와 家口 數가 적혀 있었다.
金正浩는 地圖를 들고 現場을 踏査해 보았다. 그러나 江 왼쪽에 있다는 山이 오른쪽에 있는가 하면, 마을 앞으로 굽이쳐 흐르는 내가 뒤로 흐르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 等 잘못된 곳이 많았다.
“뭐야? 事實과 너무 다르잖아, 이런 地圖를 어떻게 믿어, 좀 더 正確하게 만들 수 없을까?”
歲月은 흘러 어느덧 그의 나이 스물이 되었다. 靑年 金正浩는 地圖에 對한 關心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손바닥 보듯이 正確한 地圖를 만들기 爲해서 내 一生을 걸겠다.’ 그렇게 覺悟를 다진 金正浩는 괴나리褓짐 하나만을 등에 진 채 全國 坊坊谷谷을 踏査하기 始作했다.
그러기를 20年, 때로는 사람 사는 집이 한 채도 보이지 않는 疊疊山中에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꼬박 밤을 새워야 했고, 때로는 눈 속에 파묻혀 가물가물 意識을 잃어가다가 사냥꾼에 依해 艱辛히 救出되기도 했다.
어느 해 여름. 甚한 泄瀉 때문에 暫時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남의 집 방아품으로 겨우겨우 끼니를 이어가던 아내는 몇 해 만에 돌아온 男便을 보고도 別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어린 딸 순녀만이 다 해진 버선발로 달려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地圖가 當身하고 무슨 相關이 있다고 집 내버리고 미친 사람처럼 싸돌아다니는 거요? 나랏님이 그 일을 하랍니까? 아니면 벼슬을 내려준답디까?”
아내가 매섭게 투정부터 해대자, 딸 순녀는 어머니에게 그만하라고 말리며 아버지를 房으로 모신 後 큰절을 올렸다.
지치고 굶주린 데다가 病까지 얻은 金正浩는 그날 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더니 이윽고 헛소리까지 하기 始作했다.
그의 아내는 그제야 男便의 病이 心像치 않음을 알고 看護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食口 굶기고, 本人 病들어 죽게 되는 苦生을 무엇하러 사서 하는지…….’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순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다시 나타났다.
“어머니. 여기 아버지 藥 지어 왔어요. 어서 달여 드리세요.”
“갑자기 네가 무슨 수로 ……?”
金正浩의 아내는 無心코 딸을 돌아보다 짧게 잘려진 머리카락을 보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여보! 순녀가 제 머리카락을 팔아 藥을 지어 왔소. 孝女를 둔 德分에 살아난 줄이나 아시우.”
金正浩는 딸의 까까머리를 안타깝게 쳐다보면서 혼잣말로 되뇌었다.
“순녀야, 고맙다. 내 地圖를 꼭 完成해서 報答해 주마.”
몸이 回復되자 金正浩는 울며불며 붙잡는 아내의 손길을 뿌리치고 세 番 째 踏査에 나섰다.
그리고 다시 그가 돌아왔을 때는 그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내는 이미 世上을 떠난 지 오래였고,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에 媤집을 갔던 딸 순녀는 男便을 여의고 돌아와 홀로 親庭집을 지키고 있었다.
金正浩는 돌아오자마자 調査해온 資 料를 바탕으로 地圖 作成에 들어갔다.
그렇게 하여 圖本을 完成했으나 木板 새기는 일이 問題였다. 木板 彫刻家를 求할 돈이 없던 金正浩는 딸에게 木板 파는 技術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순녀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金正浩의 훌륭한 助手가 되었다.
순녀는 自身의 身世는 까마득히 잊고 木板을 새기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아버지를 돕는 것이 무엇보다 幸福했다.
木板 作業을 始作한 지 10年 만에 일이 어느 程度 마무리되어 哲宗 12年인 1861年, 金正浩는 처음으로 종이에 地圖를 찍어 내었다. 그 感激은 아버지와 딸의 가슴을 울렸다. 金正浩는 地圖 이름을 ‘大東輿地圖’라고 붙였다.
金正浩는 本貫이 淸道이고, 黃海道 出身인데 어려서 漢陽으로 올라와 工夫하는 일에 누구보다 熱心이었다. 그러다가 地圖 만드는 일에 뜻을 품고 오직 地圖 만드는 일에만 나서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처럼 32卷 15冊의 大東輿地圖를 딸과 함께 그리고 板刻하여 이를 興宣大院君에게 바쳤다. 그러나 興宣大院君과 大臣들은 地圖의 精密함에 놀라 나라의 機密을 漏泄한다는 罪目으로 刻板을 불태우고 金正浩를 拘禁해 마침내 獄死하게 하였다. 大東輿地圖는 이런 險難한 過程을 거쳐 나오게 된 것이다.
15. 독여취식(讀如取食)
冊을 읽는 것은 밥을 먹는 것과 같다. 讀書의 重要性과 有益함을 强調한 말이다. 밥은 몸의 糧食이지만 讀書는 마음의 糧食이라는 뜻이다.
* 仁祖實錄. 韓國人物考에.
朝鮮 第16代 仁祖 때 學者 趙緯韓 (1567~1649)이 弘文館에서 宿職을 하고 있는데 한 學童이 冊을 읽다가 中間에 갑자기 冊을 내던지며 말했다.
“冊을 덮기만 하면 읽었던 內容들이 모두 머릿속에서 달아나 버리니, 이래 가지고야 冊을 읽는 것이 무슨 所用이람.”
그러자 趙緯韓이 그 學童을 조용히 깨우쳐 주었다.
“그것은 사람이 밥을 먹으면 그 밥이 恒常 뱃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삭아서 똥이 되어 빠져나가 버리고, 그 營養分만 남아서 身體를 潤澤하게 하는 理致와 같은 거라네. 따라서 當場은 그 內容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무엇인가 저절로 習得되는 것이 있는 法이야. 그러니 冊 읽기를 쉽게 抛棄하는 것은 愚眛한 짓이라네.”
趙緯韓은 1624年 李适의 亂을 討伐하였으며 直提學을 거쳐 工曹參判을 지냈다. 그는 書藝家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어려운 民生을 그린 流民歎이라는 作品을 썼으나 傳해지지는 않고 있다.
16.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東쪽에서 밥 먹고, 西쪽에서 잠잔다. 卽 定處 없이 떠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高麗의 政權 밑에서 祿을 받아먹던 臣下들이 志操 없이 朝鮮의 太祖 밑에 들어가 다시 祿을 먹는다는 비아냥에서 緣由했다.
* 故事成語事典 . 國史大事典에.
高麗 末 松軒 李成桂(1335~1408)는 本貫은 全州이고 李子春의 아들로 永興 出身이다. 그는 遼東征伐을 反對하였으나 그의 意思가 默殺되고 도리어 右軍都統使로 任命되어 遼東을 征伐하라는 命令을 받았다.
이에 反感을 품은 李成桂는 威化島에서 回軍하여 崔瑩을 肅淸하고, 禑王을 廢位한 뒤 昌王을 擁立한 다음 軍事權을 掌握하였다.
이듬해에는 다시 昌王을 廢位하고 恭讓王을 擁立한 後 領三司事가 되고 이듬해 三軍都摠制使가 되어 舊勢力의 經濟權을 剝奪하는 田制를 改革했다.
1392年에는 恭讓王을 原州로 追放하고 마침내 太祖로 王位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國號를 朝鮮이라 稱하고 서울을 漢陽으로 옮겼다. 李成桂는 이렇게 威化島에서 回軍하여 高麗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朝鮮王朝를 開國한 後 功臣들을 慰勞하기 爲하여 文武百官들을 모아 宴會를 베풀었다. 이때 參席한 사람들은 모두 高麗 王朝의 大臣들이었다.
그런 자리에는 으레 妓生들도 參席했는데 마침 名妓 雪梅도 그 자리에 參席했다. 한참 雰圍氣가 무르익어 興에 겨워지자 한 政丞이 술에 醉하여 雪梅에게 酬酌을 걸었다.
“내 듣자하니 너는 東쪽 집에서 아침을 먹고 西쪽 집에서 잔다(東家食西家宿)던데 나하고도 한 番 놀아보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雪梅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좋지요! 저도 나으리 말씀대로 東家食西家宿하는 賤한 몸이요, 大監께서도 王氏를 섬겼다가 다시 李氏를 섬기는 몸이니, 같은 사람끼리 노는 것도 格에 맞는 일이겠지요.”
그러자 그 政丞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勿論이고 곁에서 듣던 다른 大臣들도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말은 흔히 할 일 없이 떠도는 사람이나 乾達, 놈팽이들을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
17. 동혈지우(同穴之友)
같은 窟에 사는 親舊라는 말로, 夫婦를 뜻한다. 한 修道者가 女人을 欽慕하여 꿈에 그 女人과 살았다는 內容으로, 寺刹 淨土寺가 세워지게 된 說話에서 由來했다.
* 三國遺事
新羅 때 世逵寺(只今의 興敎寺)에서 土地 管理人으로 調信스님을 任命했다. 그런데 調信은 太守 김흔(金昕)의 딸을 깊이 사랑하여 洛山寺의 觀音菩薩에게 그 女子와 婚姻하게 해줄 것을 懇切히 빌었다. 그러나 그 女子는 다른 配匹이 생겨 媤집을 가게 되었다.
그는 觀音菩薩이 自己의 所願을 들어주지 않음을 怨望하여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는데 自己가 結婚하고자 했던 娘子가 반가이 웃으며 다가왔다.
“저는 일찍이 스님을 暫時 보고 속으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父母님의 命令에 못 이겨 다른 사람에게 媤집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함께 무덤에 들어갈 同穴之友가 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調信은 自己가 바라던 女子와 같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 기뻐 함께 故鄕으로 갔다. 그리고 四十如 年을 같이 살며 아들딸을 다섯이나 두었으나 집이라곤 壁뿐이요, 끼니조차 解決하지 못해 겨우 求乞하여 延命을 했다.
그렇게 떠돌다가 溟州 蟹縣嶺에서 열다섯 살 된 큰아이가 굶어 죽어 나머지 네 子女를 데리고 다시 羽曲縣에 이르러 띠풀로 집을 짓고 살았다.
歲月은 흘러 그는 늙고 病들어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딸아이가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개에게 물려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와 눕자 夫人이 흐느껴 울며 말했다.
“내가 처음 當身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衣服도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飮食이라도 나누어 먹으면서 함께 산 지 四十 年이 되어 情도 깊게 들고, 숨은 사랑도 굳어졌으니 참으로 두터운 因緣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衰弱해져 病이 甚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로 더 以上 버티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乞食하는 부끄러움은 山더미를 짊어지는 것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미처 돌보지 못하는데 어느 틈에 夫婦의 情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어여쁜 얼굴과 웃음도 풀 위의 이슬처럼 사라져버렸고, 아름다운 鸞曲 같은 百年佳約도 한 조각 구름이 바람에 날아가듯 없어져 버렸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當身은 나 때문에 괴로움을 받고, 나는 當身 때문에 근심이 되니 어찌해서 이 地境에 이르렀는지 가슴만 아픕니다. 逆境을 當하면 버리고, 順境에 있으면 가까이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일이지만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運命이니, 우리 이제 헤어집시다.”
調信 스님이 이 말을 듣고 맞는 말이라 생각하여 各其 아이 둘씩을 나눠서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
“나는 故鄕으로 갈 테니, 當身은 南쪽으로 가시오.”
막 헤어져 길을 떠나려 할 때 깜짝 꿈을 깨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調信 스님은 鬚髥과 머리털이 모두 희어져 沒骨이 한平生 苦生을 격은 것처럼 瘦瘠해져 있었다. 그리고 貪染의 마음도 얼음 녹듯 사라져 버려 마음 깊이 懺悔해 마지않았다.
蟹縣에 찾아가 꿈에 묻었던 아이를 파 보니 둥그런 돌부처가 나왔다. 그는 寺刹의 土地를 管理하는 일을 그만두고 全 財産을 쏟아 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善行을 쌓았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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