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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삼긴 사람 : 신흠(申欽 1566~1628)

by 산산바다 2025.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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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삼긴 사람 : 신흠(申欽 1566~1628)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할샤.

닐러 다 못 닐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眞實)로 풀릴 거시며는 나도 불러 보리라.

 

-靑丘永言-

 

[현대어 풀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시름도 많기도 많구나

말로 다 하지 못해 노래를 불러서 풀었던가

진실로 (노래를 불러서) 풀릴 것 같으면 나도 불러 보리라.

 

[창작 배경]

작자 신흠(申欽)이 정적(政敵)에 의해 공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을 할 때 지은 시조이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사건이 일어나자, 선조의 유교 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관직을 빼앗기고, 향리인 춘천으로 돌아가서 지내면서 지은 작품이다. 작자는 인조 반정후 다시 복귀되어 영의정까지 지냈으며, 한문학 4대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해 및 감상]

억울하게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전원생활하고 있는 형편에서, 자연과 합일하는 한가로운 전원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작자에게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주었던 것이 바로 노래였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시름''노래'는 서로 대조되고 있다. 시름은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키고, 노래는 음악성을 겸비한 시를 가리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시는 시름과는 달리 마음속 깊이 맺힌 것을 푸는 구실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시름과 노래를 통한 '한의 맺힘''한의 풀림'을 내면적인 구조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흠의 시조관과 '노래'] 신흠은 시조에서도 표현의 격조를 존중했던 작가였다. 그는 한시로 나타내지 못하는 심정은 시조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시조는 기존의 관념을 확인하기 위해 소용되는 것이 아니므로 직접적인 술회에 머무를 수 없다고 보았다. , 신흠은 노래로서의 흥취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시조는 한시와 달라야 한다고 보았다. 이 시조를 지을 때 작가는 비록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당쟁을 일삼고 있는 조정과 광해군이 난정을 일삼는 어지러운 정치 현실을 보며 나라 걱정에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더구나 신흠은 영창대군을 옹호하다가 억울하게 벼슬에서 물러나 전원 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했다. 술로 마음을 달래 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근심이 풀리지 않아서 노래를 부름으로써 시름을 잊고 마음의 평정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작자]

신흠(申欽 1566~1628)은 조선시대 예조참판, 자헌대부,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66(명종 21)에 태어나 1628(인조 6)에 사망했다. 1585년에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6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1613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유배되었는데 인조가 즉위하면서 중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다. 이정구·장유·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종통으로 칭송되고 있다.

신흠(申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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