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간밤에 자고 간 그놈 : 이정보(李鼎輔 1697~1766)
간밤에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잊겠다.
와야놈의 아들인지 진흙에 뽐내듯이,
두더지 영식인지 꾹꾹이 뒤지듯이,
사공의 성녕인지 상앗대 지르듯이
평생에 처음이요 흉측히도 얄궂어라.
전후에 나도 무던히 겪었으되
참맹세 간밤 그 놈은 차마 못 잊을까 하노라.
[해설]
논고에 따르면 이정보는 사대부로서 사설시조를 제일 처음 짓기 시작한 사대부 음악가였다고 한다. 그는 ‘하층민 삶 안에 자리한 생의 활력’을 발견하고 그들의 ‘비속어를 시어로 이끌어와 시정 바닥 하층민의 삶을 핍진하게 그려낸’ ‘시정 풍속 묘사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작자 시비에 휘말린 아래 사설시조를 보라.
간밤에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잊으리.
기와공의 아들놈인지 진흙에 뽐내듯이, 두더지 아드님인지 국국이 뒤지듯이, 사공 놈의 큰아들인지 삿대로 찌르듯이, 평생에 처음이요 흉중에서 야릇해라.
전후에 나도 무던히 겪었으되 참 맹세하지 간밤 그놈은 차마 못 잊을까 하노라.
화자는 여성이다. 그녀는 기막힌 엑스터시의 간밤을 보냈고 그 감격(?)을 겨워하고 있다. ‘기와공과 두더지, 그리고 사공 놈’의 비유까지 끌어와 그 ‘쾌감의 강도까지 적시’하는 이 노래의 노골성은 타의 추종의 불허한다. 그런데 이 시가 영조 때 문형(文衡), 즉 대제학까지 지낸 이정보의 작품이다?
당대의 가객 김수장이 세 차례나 개편 보완한 시조집 <해동가요>에 수록된 이 작품이 이정보의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원작자 시비가 인 것은 설마 지체 높은 사대부가 그런 비속한 노래를 지었겠느냐는 일반의 통념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그러나 아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정보의 시적 경지는 일반의 통념을 가볍게 넘어선다.
님은 금성 회양의 오리나무 되고, 나는 삼사월 칡넝쿨 되어
그 나무에 그 칡이 납거미가 나비 감듯, 이리로 칭칭 저리로 칭칭, 외오 풀어 옳게 감아, 얽어져 풀어져, 밑부터 끝까지, 조금도 빈틈없이, 찬찬 굽이지게, 휘휘 감겨, 주야장상 뒤틀어져 감겨 있어
동지섣달 바람비 눈 서리를 아무리 맞은들 떨어질 줄 있으랴.
이정보의 사설시조를 통해 “사대부가 노래한 시정 풍속도”를 보여주고 있는 신경숙(한성대) 교수의 논고는 특히 흥미롭다. 이정보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누구나 배우는 아래 시조의 지은이로 조선 후기 숙종~영조 연간의 문신이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는고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작자]
이정보(李鼎輔 1697~1766) : 조선 후기에, 대제학, 지성균관사,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 또는 보객정(報客亭). 이일상(李一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성조(李成朝)이다. 아버지는 호조참판 이우신(李雨臣)이며, 어머니는 승지 윤빈(尹彬)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32년(영조 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대교를 거쳐 1734년(영조 10) 봉교가 되었다. 1736년(영조 12) 병조좌랑·정언·경기도사를 거쳐 지평으로 있을 때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時務十一條)를 상소했다가 면책을 받고 사직하였다.
1737년(영조 13) 부수찬·교리가 되고 이조좌랑·교서관교리에 전임되었으며, 1738년(영조 14) 이조정랑·응교·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를 거쳐 1740년(영조 16) 수원부사가 되어 부성(府城)을 쌓고 목장을 설치해 전마를 기르고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 1742년(영조 18) 승지·부제학·대사성, 이듬해 대사간·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48년(영조 24)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상벌을 공평히 하고 비용을 절감해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한성좌윤·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비변사제조에 선임되었으며, 1750년(영조 26) 도승지로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1752년(영조 28) 동지경연사·성천부사를 거쳐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고, 1754년(영조 30)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관·형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영조 31) 우참찬·예조판서·판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 등의 중직을 역임하고, 1756년(영조 32) 공조판서로 홍문관·예문관의 제학과 지경연사·좌빈객을 겸하였다.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로 지춘추관사·판돈녕부사를 겸하고 이어 좌참찬·세손의 사부가 되었으며 1761년(영조 37) 이조판서로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1762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63년(영조 39) 예조판서·대제학·지성균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진하였다.
성품이 엄정하고 강직해 바른 말을 잘해 여러 번 파직되었다. 글은 주의(奏議)에 능했으며 생각하는 일은 반복해 상소하고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나 시조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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