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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時調詩 ***/한국 古時調

청산이 적요한데 : 최덕지(崔德之 1384~1455)

by 산산바다 2025.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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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이 적요한데 : 최덕지(崔德之 1384~1455)

 

청산(靑山)이 적요(寂寥)한데 미록(麋鹿)이 벗이로다.

약초(藥草)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으로다.

벽파(碧波)로 낛시대 둘러메고 어흥(漁興)겨워 하노라.

 

[어휘 풀이]

* 적요(寂寥) : 고요하다

* 미록(麋鹿) :

* 세미(世味) : 세상에서 맛들인 그 맛

* 벽파(碧波) : 푸른 파도

* 어흥(漁興) : 고기잡이의 흥취

 

최덕지는 유유자적한 전원에서 살면서 지은 시조로써 자연 속에서 본성을 보전하고 기른다는 당호를 내걸었다. 바로 존양(存養)이다. 최덕지는 존양이란 당호를 내걸고 학문과 전원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이 시는 현실을 잊고 그저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찾겠다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 시임을 찾아볼 수 있다.

 

초장은 청산에서 사슴과 벗하는 자연 생활을 말했고

중장은 자연에 묻혀서 사는 생활이 생명에 이로운 약초의 맛과 같아서 세속적 현실의 즐거움은 끊어버렸다.

종장는 전원에서 고기잡이하는 흥취가 자신의 삶의 의미라고 봤다.

 

[해설]

최덕지는 영암 영보마을에서 존양(存養)’이라고 당호를 짓고 전원에서 생활하던 때에 지었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본성을 보존하고 기른다는 당호를 내걸고 학문과 전원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았을 때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에는 현실을 잊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최덕지의 고향은 전주이다. 그는 고향으로 가지 않고 처가의 고향인 영암 영보촌으로 갔다.

 

거창신씨 자자촌인 영암 영보촌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낙향한 그는 5년간 살다가 72세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문종이 영정 1본과 유지 초본을 하사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최덕지를 기리고자 영당을 세워 영정을 모셨다. 후손들은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祭祀)하고 있을 존(), 기를 양(), 사당 사()‘존양사(存養祠)’라 이름하였다. 존양이란 호는 이때 얻은 것이다.

 

[작자]

최덕지(崔德之 1384~1455) : 조선 전기에, 김제군수, 남원부사, 예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05(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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